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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边足球队全国冠军五十周年特辑

发表时间:2015-11-27  浏览次数:2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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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升班马夺联赛冠军比凯泽早了33年、比恒大早了46年,它叫吉林队
来源:新文化报 - 新文化网 《新文化报》日期是: 20131224



1965年吉林足球队夺冠后,在长春市春谊宾馆门前合影留念 F6    后排左起:韩寿银、李昌麟、池青龙、罗山默、唐凤翔、金贞缇、林钧荣、文胜鹤、朴万福 中排左起:文学吉、金锡洙、洪钟友、郑东权、许京秀 前排左起:郑钟燮、柳镇锡、池云峰、郑址胜、董景春、朴成奎、朴长寿


朴万福 本报记者 阚旋 摄


文学吉(左)和郑钟燮 本报记者 阚旋 摄

这是一段尘封的历史,这是一段被忘记的历史,这是一段充满传奇的历史。1998年凯泽斯劳滕作为前一年的德乙联赛冠军,第二年夺得德甲冠军被传为佳话,2011年广州恒大以前一年中甲冠军的身份获得中超冠军,也被认为续写了传奇。
  实际上,1965年也就是“文革”前的最后一次全国足球甲级联赛,吉林省足球队更是以1964年乙级联赛亚军的身份,夺得过1965年甲级联赛冠军。
  他们的神奇比凯泽早了33年、比恒大早了46年。48年弹指一挥间。那一年参赛的吉林队队员和教练员,已经有11人与世长辞。
  而这段传奇历史,对于吉林足球,乃至吉林体育都是一段辉煌的过往。
A吉林队怎么掉级的?
  上世纪60年代吉林省足球队水平一直挺高,但1963年全国体育系统改革,足球项目重新规范甲级队数量,当年联赛前12名打次年的甲级联赛,吉林队1963年排全国第15名,因此掉级。时任主教练朴万福回忆,那年冬天回到延吉后,到公园区散步,被人家戳后背:“看!就是他把吉林队整降级的。”关于掉级原因,朴万福总结道:“当年我是第一年带队,一直在抓技术,忽视了队员的体能,可比赛踢着踢着我们就跑不动了。”在1964年的乙级联赛中,吉林队最终获得第二名升级。其实当时吉林队完全可以以冠军的身份升级,只因为对手拿第一后可以涨一级工资,因此吉林队顺水推舟送了个人情。
B吉林队“赢了”中国队
  当时,国家队云集国内最好的队员在北京集训,以“北京体院”队的名义打联赛。后来韦迪提出的“国奥队打联赛”实际上也就是对于当年联赛制度的一种复制。1965年的甲级联赛,吉林队首战2比0轻取八一,让外界开始震惊,接下来,吉林队连败辽宁工人、辽宁、河北青年、南京部队等队,唯一的一场失利是1比4输给北京体院队。朴万福说:“我记得我们最后得分是16分,北京体院是15分。也可以说,我们赢了中国队。”
  当时的吉林队主打433阵型,全队体能好、速度快,其风格与早期的韩国队非常相似。那时的球队普遍都有短板,不是技术不行,就是体能较差,吉林队将两者融合得最好。
C吉林队当时没有国脚
  因国内最好的队员都在北京体院队,因此吉林队的夺冠阵容中是没有国家队队员的。当时的队员郑钟燮说:“我们就是几个入选过国家青年队的,不过,在联赛结束后,我和唐凤翔、许京秀,以及队长池云峰很快就被调到了国家队。”
  郑钟燮最大的特点是比赛作风顽强,他的队友文学吉评价:“其他队的队员见到他都害怕啊!”而中场许京秀的特点是控球特别好,他一拿球两个人根本抢不走。前锋池青龙是队内射门力量最大的球员。文学吉举例:“当时和我们队比赛,有任意球时,看见池青龙主罚,很多人都不愿意当人墙。球踢出来后,有人就下意识地躲。”边锋董景春速度非常快,直到现在他还离不开足球,延边长白虎队的主场比赛,他常常出现在看台上。
D中后卫百米都在12秒内
  “转身慢!”这是媒体常常用到的词,主要是指中后卫的速度慢,回追能力不行。而在那届夺冠的吉林队中,四个主力后卫中,百米速度都在12秒以内。边后卫速度快这很正常,但吉林队的两个中后卫洪钟友和唐凤翔百米也能跑进12秒。文学吉回忆道:“当时我们队员的速度都在11秒6、11秒7左右,全队我、郑钟燮和许京秀是最慢的。”郑钟燮揭秘道:“我的速度是12秒6!”他透露,因为吉林队的很多球员都是田径运动员改行,甚至包括延边州田径纪录的保持者。
E吉林队的训练全国最苦
  在延吉市体委主任岗位上退下来的文学吉夺冠时,还是小队员。他回忆:“那时候我们的训练苦得简直了……我们有练哭的,有练吐的,也有睡不着觉的,但第二天还必须要起来继续练习。”那时年轻队员不允许谈恋爱,当时球队在广州训练,女朋友给队员来信,都不敢写真名。
  在1965年年初进行的全国甲级队体能测试中,吉林队综合成绩各队第一,训练方法还得到了国家体委的表扬。当时全国球队训练时间普遍为每天7个小时左右,但吉林队最多也就三个小时。朴万福回忆说:“我们是强度大,30米要跑10组,五组一休息,而休息时间只有五秒钟。”
F 夺冠的奖励是两次宴请
  1965年联赛夺冠,当时吉林球迷欣喜若狂,球队在5月份回到长春胜利公园体育场(现已拆除)进行了一场表演赛。而夺冠之后,队员们并没有什么额外的奖励。颁奖仪式上,队员们甚至没有奖牌。文学吉回忆:“当时就发了一个奖杯,看到奖杯上刻着‘吉林足球队’,我激动得不得了。”夺冠后球队回到长春,得到了吉林省体委领导的接见,还宴请了他们。球队在长春拍了两张珍贵的照片,一张是踢完表演赛的当天回到春谊宾馆门前照的,另一张是在南岭一家照相馆照的。回到延边后,他们又获得了州领导的接见,奖励也是一顿饭。
  转年进入1966年开始了十年浩劫,运动队也受到了冲击。吉林队的球员们纷纷转业到厂矿企业足球队,只有少部分留在专业队继续从事足球运动。郑钟燮回忆:“1965年夺冠的福利直到‘文革’结束后才享受到,那就是当时的队员每人涨了一级工资。”
■对话
时任主教练朴万福:夺冠是人生中最光彩的事
  今年80岁的朴万福身体很好,如今朴老和老伴住在一套140平方米的公寓内,每天要喝一瓶啤酒,一周五天接送孙女上下学。回忆起1965年,朴老笑了:“夺冠是我人生中最光彩的事情!”
  朴万福和中国足坛元老年维泗同是第一批被选送到匈牙利留学的球员。因伤退役后,他一直留在北京担任国青队教练。1963年时任吉林省副省长张文海找到他,希望他能挂帅吉林队。可是当年吉林队就降级了。朴万福痛定思痛,第二年尝试改变了训练方法,艰苦的训练让队员叫苦不迭。“文革”期间,朴万福被扣上了“法西斯教练”的帽子,一直在延边州体委做检查。“文革”结束后,他组建了吉林三队。这支球队中最有名有当年的守门员、现延边队主帅李虎恩,以及2000年延边队救火教练廉胜必。
当时前卫郑钟燮:奠定了延边长白虎基础
  足球职业化后,郑钟燮是那一批夺冠球员中唯一参加过职业联赛的。1995年接替李虎恩带领延边队保级成功。金光柱、李光浩、朴文虎、崔光日、张庆华,这些黄金一代球员都是郑钟燮带出来的。
  现年70岁的郑老退休在家,身体非常好,但已远离了足球。郑钟燮言语中很是为延边足球的现状担忧:“现在踢球的孩子少了,过去都是年轻人踢球,现在却是老头踢球。”
当时中卫唐凤翔:慧眼识珠发现了丁俊晖
  百度“唐凤翔”,你可以找到不少他和台球有关的新闻。唐凤翔是当年夺冠主力队员中唯一一名汉族球员。在“文革”开始后,他留在了国家体委球类司工作,将我国棒球、垒球这些基础薄弱的项目提升一大截。1991年他分管台球项目,在此期间中国台球运动得到了快速发展。尤其是慧眼识珠发现了丁俊晖,让小丁直接参加国内的成年赛事。也可以说,丁俊晖的成功与唐凤翔不无关系。
  在丁俊晖自传《一杆到顶》中记述了这样一件趣事———有一次,丁俊晖染了一头黄发去参加全国排名赛。父亲丁文钧并未阻拦他个人发型的标新立异,倒是唐凤翔发现后立即找他谈话:“小晖,你现在可是中国台球选手的代表,头发弄成这个样子,怎么做代表?”慑于唐凤翔的威严,丁俊晖赶紧在赛前把头发染回黑色。
■吉林球迷不该忘记这些名字:
1965年吉林足球队夺冠主力阵容(433)
朴长寿/柳镇锡、洪钟友、唐凤翔(汉族)、郑址胜/金贞缇、许京秀、池云峰/董景春、池青龙、文胜鹤
1965年吉林足球队教练以及替补队员
朴万福、李昌麟(队员兼教练)、郑钟燮、罗山默(守门员)、金锡洙、郑东权、文亨德、崔昌国、文学吉、池秀吉、金庆俊、朴成奎、李范龙、郑顺道、崔成龙、金允哲、李龙云、林钧荣、韩寿银(领队,现具体情况不详)
本文特别感谢:“中国足球研究院”、李东哲、金真
  本组稿件 本报记者 陈涛



연변팀 전국우승 50돌기념 계렬보도《영광의 주인공들 찾아서 》(1)
   -박만복감독이 회고하는 길림성축구팀 우승
 
《제1기 중국청년축구류학생》, 《제1대 중국축구(해방후) 운동건장》, 《제1임 동북조선족축구련의회 회장》, 《중국조선족 첫 국제축구련맹 주(洲)급축구강사》…
 
중국조선족 원로축구인의 한분인 박만복옹. 그가 이처럼 많은 《제1의 영광》중에서 가장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것은 1965년 전국축구갑급련맹전에서의 첫 우승이다. 연변팀의 전신이였던 길림성축구팀의 사령탑을 맡아 일궈냈던 중국축구 최고리그에서의 첫우승! 어언 반세기란 세월이 흘러갔지만 중국조선족축구운동사에 대기록으로 남아있는 이 영광은 지금도 그의 가슴을 들먹이게 한다. 
 
1935년 길림성 왕청현 하마탕향 영안촌에서 태여난 박만복옹은 1951년 왕청현 대흥구중학교를 다닐때부터 축구에 천부를 보이기 시작했다. 1953년 연변청년팀의 선수로 선발된 그는 연변팀이 상해에서 진행된 전국11개 도시 청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따낸 후 그해 중앙체육학원 출국훈련반에 뽑혔으며 이듬해 중국청년팀에 선발돼 중국축구계에서 처음으로 되는 축구류학생으로 웽그리아에 류학을 갔다.
 
웽그리아 류학시절.
 
당시 1.73메터의 신장에 몸무게가 65킬로그램이였던 그는 웽그리아의 축구명장이자 중국축구류학생팀의 감독이였던 안베르•웨피브(阿姆别尔․约瑟夫)선생으로부터 출중한 재능을 인정받아 《분사식비행기》라 불렸다. 1955년 국가팀 전포를 입은 그는 나라를 대표해 구쏘련, 동구라파, 동남아시아 등지를 전전하며 조선족으로서, 국가대표팀의 주력으로서 영예를 빛냈다. 이후 국가체육운동위원회가 국가대표팀을 홍팀과 백팀으로 나눠 북경팀과 천진팀에 위탁관리를 시키게 되자 그는 북경팀에서 변선 수비수로 뛰면서 1957년 전국축구갑급련맹전 우승과 1959년 제1회 전국경기대회 축구경기 3등을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59년, 그라운드에서 한창 물오른 기량을 선보이던 그한테 뜻밖에도 불행이 닥쳤다. 이해 10월 10일 남경 오대산에서 전국기관차팀과 평가전을 치르던전중 불행하게도 정강이 큰뼈가 끊어지고 작은 뼈가 금이 가는 큰 부상을 입은것이다. 두달간 남경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그 후유증으로 선수생활을 접게 되였고 이후 조직의 배치로 북경팀의 조리감독으로 경험을 쌓던 그는 1960년부터 북경청년2팀의 감독으로 임명됐다. 선수시절부터 《길림성축구팀을 포함해 연변축구는 용맹 완강하지만 기본기가 없다》는 《모욕》적인 말을 수차 들어왔던 그는 이때부터 언젠가 우리 민족이 집거해 사는 고향축구를 춰세워야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마침 기회가 왔다.
 

앞줄 왼쪽 세번째 박만복

 
1962년 8월경 당시 길림성의 체육을 주관하던 장문해 부성장으로부터 길림성축구팀을 맡아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왔다. 북경의 우월한 대우, 훈련시설, 개인 발전전도 등을 뿌리치고 박만복옹은 서슴없이 연변(당시 길림성팀 연변서 훈련)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곧 시련이 닥쳐왔다. 《용맹 완강하지만 기본기도 뛰여난 팀》으로 만들려던 길림성축구팀은 그의 희망과는 달리 1963년 전국축구갑급련맹전에서 15등을 기록하며 을급팀(당시 24개팀 참가. 12등까지 갑급팀으로 분류)으로 강등했기 때문이다. 1955년에 설립된 길림성축구팀은 《동북호랑이》라 불리며 일찍부터 중국축구계의 강팀으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그 전해까지만 해도 갑급리그에서 5위를 기록했던 터라 일시에 여론이 들끓었고 비난의 화살이 사처에서 날아왔다.
 


제5회 세계청년련환절 개막식축구경기(왼쪽 첫사람)

 
길림성축구팀의 장점은 용맹 완강하고 체력이 좋은것이기때문에 기술면에서 많이 제고시키면 된다고 판단한것이 문제였다. 일단 모든 실패의 책임을 떠메고 《와신상담》에 들어갔다. 그해 동기훈련에서부터 중국체육계에 불고있던 《삼종이대(三从一大)》 훈련원칙에 립각해 대운동량훈련에 돌입했다. 《간고하고 엄격하며 실전적인데로부터 출발하여 대운동량 훈련을 진행하는(从严、从难、从实战出发、大运动量训练)》 이 훈련원칙은 대강도, 대밀도, 초경기량훈련을 견지하는것에 그 기반을 두고있었다.
 
선수들은 이런 《마귀훈련》을 시키는 박만복옹을 뒤에서는 《파쑈감독》이라 불렀지만 그래도 참고 끝까지 잘 따라주었다고 한다. 튼튼한 체력을 바탕으로 선진적인 유럽식기전술을 무장한 길림성축구팀은 이듬해 갑급련맹경기에서 일약 준우승을 따내며 다시 갑급리그에 복귀했다. 하지만 실패의 경험이 있었던 박만복옹은 이에 안주하지 않고 그해 남방에서 있은 겨울철훈련에서도 역시 《마귀훈련》으로 만전을 기했다.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악수

 
길림성축구팀 고유의 용맹하고 완강하며 쾌속공격을 구사하는 풍격이 시합 곳곳에서 화려하게 부활했고, 그러자 축구계에서는 《동북호랑이가 다시 내려왔다》고 대서특필했다.
 
 
길림성축구팀 선수들이 매번의 게임에서 평균 7000메터의 이동거리를 기록하고있다는 얘기에 조사연구를 나온 중국축구협회 전문가들이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간판공격수인 《제비》 동경춘은 1965년 갑급련맹경기를 앞두고 진행한 훈련성과 검열대회에서 총 2만 9889미터를 기록, 그중 9987미터는 막판에 전속력으로 내달리는 이른바 스퍼트(冲刺)로 마무리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훈련지옥》에서의 결과는 화끈한 보답으로 돌아왔다.
 
부인과 함께. 
 
1965년 전국축구갑급련맹경기에서 길림성축구팀은 7승 2무 2패 합계 16점(당시 2점제)으로 우승을 일궈내고 뛰여난 시합풍격으로 당시 우승컵과 동등시하던 체육도덕풍격상까지 받는 쌍풍작을 따냈다. 특히 국가대표팀도 그해 전국갑급련맹전에서 순위를 기록하지 않고 참가했는데 마지막 총점에서 15점을 기록, 길림성축구팀에 뒤졌다는 후문이다.
 

연변축구팀으로서는 현재까지 전국 최정상급 축구리그에서 유일하게 따낸 전국 우승, 오늘날 연변축구의 부활에 밑거름이 되여 새로운 우승을 따내는데 응원이 된다면 그보다 더 기쁜것이 없겠다며 박만복옹은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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提起延边敖东队,相信广大铁杆儿球迷会记忆犹新。在中国足坛,这支由朝鲜族球员组成的少数民族球队有过自己的辉煌和悲情!延边敖东队是豪门?可能很多人都不以为然。我是个延边朝鲜族,从小看球,看的都是延边队,在我眼里,延边敖东队是一支毋庸质疑的“豪门”球队,悲情“豪门”!

历史的辉煌

在中国足坛,延边足球的历史和辉煌都是可以大书特书的一笔。延边的第一支球队始建于1908年,当时的延边地区处在日寇半殖民化的状态(九一八是1931年,但早在20世纪初,延边这一三不管地带就被日寇给霸占了。)。1926年当时的龙井东兴中学队赴朝鲜参加了第二届朝鲜足球赛,这也算是延边足球第一次走出国门。解放后,吉林省足球队在1955年成立,当时这支球队是全中国第一个省级足球队。而在当时的吉林队,球员百分之百都是来自延边的朝鲜族球员,吉林省队其实就是延边队。这支全部由朝鲜族组成的球队从1962年就一直是甲级队。1965年国内甲级联赛,吉林队一举夺魁,但因为第二年文革开始,联赛被迫取消,这些冠军队成员也就此埋没。即使是这样,当时的吉林队为国家培养了不少优秀球员,建国初赴匈牙利(当时匈牙利的足球水平堪称无冕之王)留学的中国球员中就有如朴万福、金昌吉、金仁杰这样的7名朝鲜族球员。七十年代国家队右路第一人李宙哲也是朝鲜族,只不过他出自黑龙江鸡东县,而非延边。出自延边闻名的国字号球员还有崔泰焕、金光洙、崔光日、高钟勋、金光柱、李红军、李时锋、赵铭等。据说延边足球从上世纪五十年代至今,先后培养过40多名国脚。可以说,中国足球运动的发展,延边足球功不可没!

亮相甲A

1992年,一直在甲级和乙级徘徊的延边队终于登上甲级联赛的舞台!当时,中国足球还没开始职业化联赛,还没有甲A和甲B的区分,但李虎恩带领的延边猛虎还是如入羊群,杀得北京、天津、大连这样的强队毫无还手之力。当时的延边队让所有人都看到了一种全新的全攻全守打法。前锋前锋方根燮、崔光日,突前李时锋,中场金明国、姜峰和高仲勋的“铁三角”,后卫则有李红军、金光柱。这些球员共同构成了延边队冲杀甲级联赛的砝码和资本。94年,中国足球职业联赛正式开幕,延边队从韩国拉来50万美元的赞助,正式冠名为延边现代队,开始了长达7年的甲A冲杀!94年,第十垫底,95年第七中下,96年又是第十垫底。虽然球员们在球场上玩儿命冲杀,球迷也在场外高声呐喊支持和声援自己的球队,但球队的成绩还是不尽如人意。延边队,需要一次蜕变,东北虎,早已饥饿难耐!

一位白发苍苍的老人——崔殷泽

1996年12月的一天,一位白发苍苍、举止谦和有礼的老人来到了中国东北的边城——延吉。催殷泽,在延边人民心中他是一位慈祥而又严厉的长者,在延边敖东队的历史上,他又是一位创造了奇迹的外籍教练。催殷泽老人是韩国汉城大著名的足球教授,当时的延边足球俱乐部在聘请这位老人时,也肯定没想到这位白发苍苍的老人带给延边足球的将是一段难以忘却的辉煌!同年,延边现代队正式改名为延边敖东队。东北虎,开始真正虎啸甲A!97年中国甲A开幕后,许多人都大跌眼镜,风光无限的不是大连万达,也不是北京国安,更不是上海申花,而是独霸边陲、虎啸长白的东北虎——延边敖东!在催殷泽老人的调教和带领下,这只东北虎在当年的中国足坛可谓是“佛鬼不能挡道,见谁就灭谁”!高钟勋、金光柱这些老队员从新焕发第二春;布拉吉玛、左拉这些来自非洲小国的外援神勇异常;金青、金永俊,这些小将如初生牛犊。一位白发苍苍的老人,带领着一群血性的朝鲜族汉子,如当头一棒敲醒了沉寂多年的中国足坛!97年,延边敖东队以甲A联赛第四名的优异成绩荣获足协颁发的“进步最快奖”。一个边陲小城的小俱乐部,能和重金打造的大连万达、上海申花、山东泰山等俱乐部正面拼杀而不落下风,已经是很不容易了。这一成绩,也成为职业联赛举办以来,延边队所取得的最好成绩。

1998年联赛开幕,延边敖东队接连失利,目光短浅的俱乐部高层与骨子里倔强的催殷泽老人间的矛盾公开化,在一句老人无心的“不干了”被随行翻译翻译成“我辞职”后,老人真的离开了延边,离开了延边敖东队。我还清楚地记得,当延边球迷得知老人将要离开的消息时,群情激动。有一个球迷跑进球场,面对催殷泽老人“噗通”下跪,泪流满面,恳求不要离开敖东队,不要离开延边,不要抛下延边的球迷。一向淡然自若的老人,再也难以自已,双手扶起那五尺高的汉子,拍打着他的肩膀,久久无语。

一个外国人,一位白发苍苍的老人,不远万里来到中国,来到延边。把中国的足球事业,把延边的足球事业当作他自己的事业,这是什么精神?这是国际主义精神,这是无限热爱足球运动的精神!催殷泽老人,一路走好!延边人民永远怀念您!

永远的大哥,永远的领军人物——高钟勋

高钟勋大哥,在延边,我们都这样叫他。高钟勋是延边朝鲜族自治州龙井市东盛勇乡人,是一个纯朴、地道的朝鲜族汉子。家里从祖上开始就是农民,家境贫寒。高钟勋16岁那年被选入当时的吉林青年队,从此为延边队拼杀了整整22年!在延边人心目中,高钟勋就是延边敖东队,高钟勋就是延边足球的骄傲!毫不夸张地说,只要高钟勋出现在球场的中央,延边人就不怎么关注中场了,因为不用担心什么。而每当出现高钟勋充满灵感的盘带和传球时,整个球场就山呼海啸、掌声如雷。高钟勋还有一手任意球的绝活儿,有一次,我有幸亲眼观看延边敖东队的内部训练。看到高钟勋练任意球,30米开外,一棵树,树的躯干上用白色的涂料画了个足球大小的圆圈,高钟勋就在30米开外,用不同的脚法和弧度,命中那个圆圈。成功率?我仔细地数过,10次至少有8次是命中,神乎其技!或许有人会说,你就吹吧!不信也没办法,这是我亲眼所见。

高钟勋不仅是球迷心中的大哥,更是所有球员心中的大哥。有他在,年轻球员就不再紧张;有他在,老队员也看到了榜样的力量。在场上,他就是整个球队的灵魂!如果说,在国家队,在延边队的高钟勋还没被更多的国人所熟悉,那么,这位纯朴、耿直的朝鲜族汉子那句在愤懑中的绝望呼喊:“中国足球没戏了!”,让所有中国球迷为之动容,铭记于心!多年后,高钟勋在延吉开了间练歌房,带着老婆孩子,过上了平静的生活。练歌房的生意很火爆,来唱歌的人目的都很简单,给高钟勋大哥捧场!大哥,你辛苦了!即使中国足球忘记了你,我们延边人民也永远不会忘记你!

血性、真诚的球迷

要说在当年的中国足坛哪支球队的球迷最铁杆?我自认为我们延边球迷是最真诚、最铁杆儿的球迷!延边地处边陲,是个穷地方,没地理优势、没海外关系(我不认韩国,催殷泽老人是特例)、更没有什么资源。地方穷,球迷也穷。到过延吉主场踢球或采访的球员和记者们肯定对一幕景象记忆深刻。延边敖东队的主场——延吉体育场是一个只能容纳3万多人的小球场,看台都是用水泥做的,没有专门的座椅。一张卖30元的门票也有许多人买不起,正好球场周围有不少高达10多米的大树,于是,那些没钱又没票的球迷就爬上树梢看球,几年下来,都练就了一身“好本领”。而这“树梢看台”也成了延吉主场一道非常特别的风景。有一次,延吉主场翻修,敖东队的主场移至龙井体育场,龙井体育场地势低矮,一条比球场还高5、6米的铁路线绕着球场边过。有很多球迷就坐在火车通过的铁道线上看球,等火车过来的时候,就纷纷起立,让道给火车,等火车过去了就又施施然坐回原位,继续看球。为了看球,“生死不足惜”!

都说足球是男人的运动,这话不假,可在延边,足球就是不分男女老幼,大家都喜欢的运动。每到延边敖东队主场比赛的时候,小小的延吉市就人满为患。延边州9个县市的人们都往延吉赶,能真正看上球的人很少,可还是要去,为什么?不为别的,图个热闹!场上的球踢完了,可球迷们场下的“球”才真正开始。小酒馆里,有钱的、没钱的、看上球的、没看上球的,都在说球,侃球。说高钟勋,说催殷泽,喜欢说什么就说什么,但都离不开球。谁?拉倒吧,他不行!你说谁不行?再说跟你急,跟你连喝三杯白的!邻座的也在说球,咋的?不服啊?不服过来吧,拼桌!最后,都成亲兄弟了,谁跟我抢算账(买单),跟谁急!虽然延边敖东队的球员大部分都是朝鲜族,但球迷却不分民族。不管你是汉族还是满族、回族、蒙族、朝鲜族,喜欢延边队不?喜欢,那就是俺们球迷!延边的足球,没那么多功利,有的只是对足球发自内心深深的热爱!延边人是纯朴的,更是耿直和血性的。所以,才更容易受到伤害。

最后的悲情
1998赛季,“黑”的一塌糊涂的赛季,黑哨横行的赛季!延边足球一直是倔强和不畏强势的,这也决定了延边足球一直游离于中国足球的大环境外,而延边足球与黑哨、与中国足协间的对抗也在1998年达到白热化的程度。98年5月,延边敖东连续客场对战北京国安上海申花,在与申花队的比赛中,因主裁判明显故意的连续误判主教练高辉再也忍不下去了,冲进场内和主裁判发生争执,比赛也因此暂停,中国足协扬言要处罚延边敖东队。但球队一回到延吉,在机场外等待着他们的确是整整8万球迷!我还清楚地记得,当时还是个高三学生的我按捺不住心中的气愤,跟几个朋友一起去机场。从龙井坐小巴到了延吉市区,去机场还得打计程车,可那计程车师傅一听我们是去为延边队声援,就立马儿说“不要钱了,今天去机场的球迷都不要钱,咱延边人是穷,可穷也得跟这帮孙子磕出个明白来!”。那天,无数球迷打着“中国足协道歉!”的横幅,从机场一直排到市区。最后,中国足协让步了,足协副主席王俊生在电视上公开道歉。同年8月9日,敖东队客场对重庆寰岛队,又是一次明显的黑哨!重庆大田湾体育场见证了敖东队热血汉子们发出的绝望的呐喊:“中国足球没戏了!”。2000年9月10日,又是在重庆大田湾体育场,敖东队1:7惨败给重庆隆鑫队,提前四轮降级。在中国的甲A赛场征战、冲杀整整七年的东北虎终于倒下了!同年11月,敖东队以2500万人民币被转让给浙江绿城房地产开发有限公司。这意味着,延边足球正式离开了征战多年的甲级联赛。转让事宜被事先曝光,一时间延边人民群情激奋!无数球迷涌向了俱乐部,“俱乐部没钱,我们自己掏钱养活球队,求求你们,不要把延边队卖出去”。无数球迷围在俱乐部外面不肯离去,无数人在痛哭流涕,夜深了,不知是谁拿出打火机,点着了火,于是只要是有打火机的人都拿出来点上,一时间,整个俱乐部周围都是打火机的火光。深秋的延吉早已是寒风萧瑟,在萧瑟的寒风中,在一片片打火机的火光照耀下,痛哭流涕的球迷,显得是那样的无助和悲壮!球员们跑到州政府,向主管文体的副州长李洁思恳求,“以后工资发多少,我们就拿多少,我们不愿离开延边”。我们不愿离开延边!我们也同样舍不得你们啊!敖东队,你真的离开了我们吗?写到这里,我真的写不下去了,这一段就写到这里吧!
悲情后的思考
一支极具特色的球队,一支敢打敢拼、热爱足球的球队,最后的结局竟是如此的凄惨和悲壮,为什么?

地方色彩,是延边敖东力量的源泉,但最后这也阻碍和局限了延边敖东队的发展,可谓“成也萧何败萧何”!

陈旧、闭塞的体制是延边敖东队终究没能摆脱的桎梏。别的俱乐部已经从旧时的政治带头,行政管理的框框中突围而出,开始走正规职业俱乐部的轨道,而延边敖东队还是由州政府带头,俱乐部行政管理的旧体制,想有所创新比登天还难!

后备力量的培养和使用方面,俱乐部犯了致命性的错误。再想挽回,为时已晚矣!

人才的流失。不少优秀的人才无端的被转卖到别的俱乐部,或者干脆是自费转会,痛心不已啊!

延边敖东队在甲A的七年,正是中国足球从职业联赛起步,发展、蜕变的过程。作为一支极具地方色彩和人文倾向的球队,延边敖东队对中国足球的贡献有目共睹。虽然,最后倒下了。可倒下了它也是只东北虎!在我这个从小看着延边队踢球长大的延边球迷眼里,延边敖东队就是我心中永远的“豪门”!

东北虎,我等待着你再次虎啸长白!(在网络中搜集)

运动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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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仲勋,延边朝鲜族,是20世纪延边足球乃至整个吉林足球的标志性人物,1997赛季至1999赛季期间效力于延边敖东足球队。巅峰时期为中国中场球员中的No.1。在延边和国家代表主要司职过后腰
 

1994赛季 21场5球
1995赛季 21场5球
1996赛季 11场2球1997赛季 18场1球
1998赛季 25场4球
1999赛季 21场2球
2000赛季 16场1球
共计 133场20球
 

A级赛事

1992年10月29日 亚洲杯 N KSA △1-1
1992年10月31日 亚洲杯 N THA △0-0
1994年10月01日 亚运会 N TKM △2-2 1球
1994年10月03日 亚运会 N YEM ○4-0
1994年10月05日 亚运会 N BHR ○3-2
1994年10月07日 亚运会 N IRN ○1-0 1球
1994年10月13日 亚运会 N KUW ○2-0
1996年05月23日 友谊赛 H ENG ●0-3
1996年05月29日 友谊赛 A NED ●0-2
共计 9场2球
1998赛季 珀金斯中场发动机(中国最佳中场)
1984年,进入吉林省代表一队。
1985年,高仲勋作为主力出战苏联世青赛。中国U20小组赛先是1比3负墨西哥,接着2比0胜英格兰,再是2比1胜巴拉圭,进入八强0比1输给东道主苏联。
1988年,被调入徐根宝挂帅的国家二队参加甲级联赛。
1990年,国二重组为国奥,超龄的高仲勋回到吉林省代表。
1992年,广岛亚洲杯1比1平沙特是高仲勋A级赛事首次登场。
1993年,七运会助吉林省代表获得第五名。
1994年,中国足球职业化,整个赛季高仲勋只缺席了一场比赛(5月8日主场对沈阳六药的比赛中,首次为延边进球)。在广岛亚运会(此届亚运会属A级赛事)中,高仲勋为中国代表获得亚军立下汗马功劳(1/4决赛对伊朗攻入的制胜一球;决赛因累积黄牌停赛)。
1996年,足协杯与上海浦东比赛时,高仲勋被踢成重伤,下半赛季报废,养了整整9个月的伤。
1997年,韩国崔殷泽教授执掌延边,高仲勋成为延边的领袖,率领球队掀起了长白虎旋风,勇夺甲A第四名(崔殷泽处理球队内部问题之前,前5轮延边还是1平4负排名垫底)。
1998年,继客场对北京国安、客场对上海申花之后,延边在重庆第三次遭遇了明目张胆的黑哨,赛后高仲勋对着镜头悲壮地吼出“中国足球没戏了!!!”。后来这句预言真的应验,中国足球十多年来节节败退,被“假、赌、黑”腐烂到根,跌倒了谷底。
1999年,带领球队联赛中屡次上演宰落领头羊的好戏。足协杯进入四强(半决赛第二回合主场对山东鲁能,补时被对方打进宝贵的客场进球遭淘汰)。
2000年,35岁的高仲勋开始学做板凳,但是延边新老交替没有成功,也犯了不少重大错误,最终降级。年末球队连同甲B资格抛售给浙江绿城。高仲勋被挂牌,后应曹限东的召唤加盟了乙级的北京宽利
2001年,随着北京宽利冲击甲B失败,高仲勋最终挂靴。

高仲勋在延边7年甲A期间多次放弃了另攀高枝的机会,一直坚守吉林延边,给球迷留下了诸多美妙时刻。男女老少皆爱足球的延边人民视其为镇山之宝。


生涯数据


赛季
俱乐部
号码
出场
进球
国家
联赛等级
排名
2000
22
16
1
中国
1
14
1999
22
20
2
中国
1
8
1998
22
25
4
中国
1
10
1997
22
18
1
中国
1
4
1996
20
11
2
中国
1
10
1995
20
21
5
中国
1
7
1994
15
5
中国
1
10





李红军,1970年01月23日出生于吉林省图们市。1982年-1986年延边州体校队,1987年-1996年吉林敖东队,1993年、1997年入选中国国家足球队,2001年李红军转会到成都五牛队,并在该年退役,在北京经商。


1997年北京国安队 全国足球甲A联赛季军 中国足协杯冠军 九七赛季中国足球超霸杯冠军
1997-1998第八届亚优杯季军
 
1998年-2000年在北京国安队 全国足球甲A联赛季军
2012年至今,老男孩足球俱乐部
朝阳联盟、铭人体育队教练。
 

生涯数据


年份 参赛俱乐部 首发出场 替换出场 总次数
1995 吉林敖东 19 0 19
1996 吉林敖东 20 1 21
1997 北京国安 18 0 18
1998 北京国安 22 1 23
1999 北京国安 15 1 16
2000 北京国安 17 2 19
2001 成都五牛国腾 18 1 19


来自:龙南 > 《延边消息》


























五十年后的延边队:

延边提前1轮夺冠 理工留保级悬念联盛降级

本轮延边长白山队坐镇主场迎来湖南湘涛队的挑战。上一轮比赛,延边长白山队客场战平武汉卓尔提前两轮完成冲超,重新回到中国足球顶级联赛。此番回到主场,延边长白山队肯定是希望能够给主场球迷奉献一场精彩的比赛。所以面对湖南湘涛肯定不会“手软”。
  反观湖南湘涛队,上一轮迎战保级对手北京理工队拿到了三分。第51分钟,河太均进球将比分改写为1-0。第54分钟查尔顿破门,将比分扩大为2-0。第64分钟,河太均梅开二度,将比分扩大为3-0。第81分钟,河太均完成帽子戏法将比分改写为4-0。最终延边长白山主场4-0大胜湖南湘涛,在大胜对手的同时,也提前一轮获得本赛季中甲联赛冠军。

另讯:延边长白山足球队与朴泰夏主教练再签两年(2015.12.10-2017.12.9)合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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